학술활동

[발굴조사] 청주 송절동 유적
  • 조사지역
    충북 청주시 흥덕구 송절동 산 35-12번지 일원
  • 시대
    원삼국시대ㆍ생활유적
  • 유적성격
    매장유적ㆍ생활유적
  • 시작일
    1992.11.21~12.26/1993.9.1~11.18
  • 종료일

 

 

   송절동유적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충북 청주시 송절동 산 35-l2, 산 36-1이다. 이 유적은 금강 상류의 지류인 미호천 주변이며, 송절동ㆍ화계동ㆍ내곡동ㆍ상신동ㆍ원평동ㆍ문암동 일대의 낮은 구릉상으로 넓게 펼쳐진 곳에 고분군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이 유적 일대의 자연지형은 남-북으로 약간 뻗어내린 주능선(해발 80~90m)에서 여러 곳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 중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에 고분군이 집중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번에 조사를 실시한 제2차년도에는 정상부에서 북동쪽으로 "긴S자형"을 이루고 있는 지역 중에서 77~83m 지점(93-A:3~6호분)과 64~70.5m지점(93-A:1~2호분), 해발 59~62m 지점(93-B:1~6호분)의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A지구에서 원삼국시대 고분 6기, B지구에서 원삼국시대 고분 6기와 조선시대 주가지 4기, 조선시대 질그릇 요지 1기, 조선시대 수혈저장공 1기, 노지 1기를 조사하였다. A지구 1ㆍ2호분은 장축방향이 동-서방향에 가깝고, 3호는 남-북방향, 4~6호는 동-서방향에 가깝다. B지구의 1~4호분은 북동-남서향이고, 5호와 6호분은 동-서향이다. 조사된 고분은 B-5호분을 제외하고 모두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게 묘광이 만들어졌다.

조사된 원삼국시대 고분 12기는 모두 도굴이 이미 된 상태여서 출토된 유물이 많이 교란이 된 상태였으나, 일부분은 제 위치에 놓여있었다. 출토된 토기편을 복원하여 본 결과 대체적으로 단경호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몇 기를 제외하고는 심발형토기 1점씩이 공반되고 있다. 철제류의 부장은 극히 빈약하며 화살촉이 부분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장신구로는 유리구슬이 A지구 3ㆍ4ㆍ5ㆍ6호분과 B지구 6호분에서 출토되었다. B지구 5호분에서는 흙구슬 1점, 4호분에서는 토제 방추차 1점이 출토되었다. A지구의 6호분과 B지구의 3ㆍ5ㆍ6호분에서는 칠기류가 부장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주칠흔이 확인되었다. B지구의 4ㆍ5ㆍ6호분에는 유물부장부에 칠기흔이 많이 찾아 지고 있어서 많은 양의 칠기류가 부장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묘광의 주위로 돌아가면서 주구가 만들어진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능선의 윗쪽부분에서 조사된 A지구 3~6호분은 모두 주구의 시설이 있었다. 이 주구가 서로 중복이 되지 않는 상태로 보아서 묘역의 경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한 토광묘 단계에서도 얕은 봉분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원래 봉분은 이 주구의 경계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봉분은 주구의 형태와 비슷한 말각장방형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A지구의 3~6호분의 봉분의 크기는 대체적으로 8~1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토층흔적으로는 전혀 밝힐 수 없었다.

B지구에서는 합장묘 구조를 가진 고분 3기(2ㆍ3ㆍ6호)가 조사되었다. 이 합장묘는 묘광이 깊은 고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낮은 것이 뒤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또한 고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에 바로 잇대어서 축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조사된 송절동 원삼국시대의 고분은 인근의 청주 신봉동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이곳 고분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유적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의 조사는 유적이 넓게 분포하는 범위의 극히 일부분에 대한 발굴조사였으므로, 송절동유적의 전체적인 성격 규명에 대한 판단은 이르다. 그러나 원삼국시기의 고분 중에서 처음으로 합장묘가 조사되었듯이 앞으로는 서북한지방과의 관련되는 유구가 찾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합장묘에서도 먼저 만들어진 고분과 늦게 만들어진 고분 사이의 선후 관계가 확인이 되고, 특히 같은 시기에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므로 이 시기의 묘제 등을 살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북한 지방의 합장묘에서 남성과 여성의 방향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방향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았지만, 묘광이 깊은 것이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지 못한 점은 앞으로 조사 결과에 따라 해석의 실마리가 풀릴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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